적상산(赤裳山)에 다녀와서
결혼한 후로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어서인지 몸보다도 설레임이 앞섰다. 더 늦기 전에 가을산을 보자는 심산으로 나선 길이었다. 청양을 거쳐 대전에서 대진고속도로를 타기로 한 우리는 졸음을 눈꼬리에 매단 채 어둠 속을 달렸다. 워낙 이른 시간에 출발해서일까, 홍성을 지날 때까지도 어둠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논바닥에 누운 서리의 도도한 빛은 감출 수 없었던지 갖가지 형상으로 밤을 세운 하얀 군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늦었나 보다. 단풍이 저리 시린 서리의 극성을 이태껏 버텨내고 있을까.
칠갑산 휴게소에서 된장찌개 한 뚝배기를 비우고 달리는 길은 한결 따숩게 다가왔다. 어느새 산 능선에는 붉은 빛이 찬연했고, 서리는 반짝거리다가 이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렇게 쉬이 무너질 걸 알면서 밤새 쌓았을 그들의 얼음탑이 아지랑이 속에서 가물거렸다.
대전에서 고속도로로 접어들자 목적지에 성큼 다가선 느낌이었다. 금산을 지나 무주IC를 벗어나니 곧바로 아담한 산 하나가 수줍게 우리를 맞고 있었다.
적상산! 덕유산 자락의 하나로 남도의 부드러움을 갖춘 산. 하지만 첫인상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주차시설조차도 되어 있지 않아 인가의 구석구석에 차들이 머리를 들이밀고 서 있었다. 위험에 닥친 꿩이 다급해지면 머리만 박는다더니 딱 그 형상이었다. 전국 호패를 달은 버스들은 산악회원들을 한 무더기씩 쏟아놓고 어디론지 가버렸다. 주차공간이 없어 그러는구나, 이렇게 시설을 허술하게 해놓고 입장료를 받다니……. 그러나 산 정상에 올라 아래 전경을 내려다보고 내 착오가 얼마나 큰 것인지 금방 알게 되었다. 반대쪽에는 안국사에서 올라오는 길이 번듯하게 나 있었던 것이다. 잠시 내 오해의 불씨가 됐던 버스들은 큰 주차장에 나란히 앉아 주인을 기다리며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가 들어선 곳은 등산로. 선무당이 사람 잡을 뻔 했다.
등산로는 키 작은 떡갈나무가 아직도 울긋불긋 화사한 옷을 입고 입구를 장식하고 있었고, 갈참나무가 만든 터널 아래 정겹게 놓인 돌계단을 지나 지그재그로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끝인가 싶으면 다시 새 길이 열려 있고, 다 왔다 싶으면 또 다시 이어지는 길. 우리 사는 일이 꼭 그렇지 싶었다. 한 고비 넘으면 괜찮겠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고비를 넘어설 때마다 붙잡았던 희망의 편린들, 알고 속고 모르고 속으며 사는 우리네 삶이 어쩜 다행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길이 끝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면 아마 지레 지쳐 포기하고 말았을 테지. 내려오는 사람마다 조금만 더 가면 정상이라는 거짓말이 얼마나 넓고 깊은 배려의 말인가.
산을 배우면 인생을 배우는 것이라 말한다면 억설일까.
헉헉거리며 오르는 길이 향로봉 1,034m에 이르러서야 마침표를 찍었다. 밑에서 볼 때의 부드럽고 순하게 생긴 첫인상에 비한다면 꽤 높은 편이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니 뾰족하게 하늘을 찌르던 갈참나무 가지들이 갈대꽃처럼 부드럽게 거대한 물결을 이루고 있었다. 장관이었다. 단풍을 기대하고 온 산행에서 앙상한 나무들만 보며 오르는 것은 마음 상한 일이었으나, 수북히 쌓인 낙엽을 옆에 끼고 걷거나 다 비운 가지들이 하늘을 향해 손사래치는 모습을 내려다보는 것 또한 큰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여름내 건강하게 키운 자식을 발밑에 모아 놓은 이유가 가지들의 공간을 채워서라도 겨울 한파를 막아주려는 것이라 생각하니 온갖 생물들의 부모됨이 경외롭기까지 했다. 단풍이 들면 사방이 붉은 치마폭을 펼친 것 같다는 기막힌 경치를 보지 못한 건 못내 섭섭한 일이었지만 말이다! . 赤裳山이 아니던가!
안국사는 고려 충렬왕 때 지어진 것이란다. 임진왜란 때는 승병들의 거처로, 광해군 때는 왕이 친히 <조선왕조실록>과 <선원록>을 선원사를 지어 적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게 했으니 이름이 안국사(安國寺)인 연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절만 있었다면 어찌 안전했을까. 산을 오르다 보면 곳곳에서 최영 장군을 만나는데, 바로 그에 의해 산성이 지어졌기 때문이었다. 거란 침입 때는 물론이고 임진왜란 ․ 병자호란 등 많은 전란 속에서 안국사 뿐 아니라 인근 마을 사람들도 그 곳에서 안전할 수 있었다 한다. 신라와 백제가 각축전을 벌이기도 했던 군사상 요충지이기도 하거니와 정상에 산정호수까지 있으니 성을 쌓지 않았다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겠다.
산 중턱 쯤에서 만나는 장도 바위를 보면 최영 장군에 대한 사람들의 신망이 얼마나 두터웠는지 알 만하다. 장군이 주민을 이끌고 산을 오르는데 15m도 넘는 퇴적암이 길을 가로막자 단칼에 사람 지날 만큼의 길을 만들어 주었단다.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쩍 갈라진 채 깎아지른 절벽으로 서 있는 그 위용에서 전설만큼이나 신비로운 기운이 배어나왔다.
하산하는 길은 늘 마음이 부자가 된 것 같아 좋다. 맑은 공기는 가슴에, 아름다운 풍경은 두 눈에, 해냈다는 뿌듯함은 온몸에 가득 담고 내려오니 주기에 아낌없는 산이 소중하기 그지없다. 적상산에서처럼 역사 위를 걸었다면야 말해 무엇하랴.
밟히는 가랑잎 바삭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러고 보니 함께 오르던 많은 사람들이 모두 안국사 쪽으로 빠져 산이 텅 비어 있었다. 고요한 산, 그와 둘이 마주하면 그는 내게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다. 사는 건 한없이 품는 것이며 나누는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