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의 <김정희>를 읽고
완당(阮堂)과 추사(秋史)가 한 사람을 이르고
칠십일과(七十一果)와 비불비선(非佛非仙)도 다르지 않습니다.
김정희는 조선인이며 대한인이며 세계인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저자 유홍준의 말이 하도 무서워서 일부러 속도를 늦춰 읽었고
구입한 지 반 년 만에 겨우 책 한 권을 다 읽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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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의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를 꼽는다.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만 남는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나의 소견으로는 완당 김정희 이다. (424쪽)
유홍준은 완당의 평가가 대한민국이라는 좁은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거부합니다.
완당의 글씨는 마땅히 중국 서예사, 중국과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양 서예사,
나아가 세계 서예사라는 측면에서 다뤄져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인 것이며,
그의 말을 따르자면 세계 서예사 속에서의 시대별 대표 서예가로는
남북조시대의 왕희지와 왕현지,
당(唐)의 구양순과 저수량,
송(宋)의 소동파와 미불,
원(元)의 조맹부와 명(明)의 동기창,
그리고 청(淸) 시대의 대표로 조선의 김정희를 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칠십일 세 수를 누리는 동안 김정희는
남쪽 제주도와 북쪽 북청에서 두 차례 귀양살이를 하게 되는데
35세 등과 이후 이십여 년 동안에 쌓아 올린 추사의 문명을 과소평가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55세에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어 문밖출입조차 자유롭지 못했던 9 년의 유배생활과
정계에서 떠나 있다가 다시 북청에서 보낸 1 년의 귀양살이와
권력의 무상함 속에 과천의 과지초당(瓜地草堂)에서 보낸 말년의 4 년은
서예가로서의 완당 김정희를 무르익게 만든 시기로 봐도 지나침이 없겠습니다.
‘알면 보이고 보이면 사랑하게 되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이미 예전과 같지 않으리라’던
《문화유산답사기》에서유홍준이 우리에게 들려준 말의 효력은 여전합니다.
풍부한 도록으로 첨부된 완당의 글씨들을 반복해서 보는 동안
점점 더 추사체라 불리는 완당의 글씨가 예사롭지 않게 보이기 시작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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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에 부족함이 있지만 나는 70 평생에 벼루 열 개를 밑창 냈고 일천 자루를 몽당붓으로 만들었다. (吾書雖不足言七十年 磨穿十硏 禿盡千毫)
저렇듯 완당을 만든 것은 타고난 자질만이 아닙니다.
그는 나이 칠십에 이르러서도 청국에서 들어오는 새로운 문물이 기록된 서적에 욕심을 냈고
몸이 아파 드러누워있다가도 청이 있으면 일어나 붓 잡기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입을 모아 법고(法古)하면서 창신(創新)하기까지 한 것은 완당밖에 없다 말했을 것이고
나라 안은 물론 청나라와 일본에서까지 그의 글씨를 얻으려고 줄을 섰던 것일 테지요.
웬만한 자신감 아니면 도달할 수 없는 경지이겠지만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고, 말하면 다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했을 만큼
완당은 스스로 체득한 것을 세상에 알려주기를 꺼려하지 않았다는데
후대의 우리가 풍부하게 남아 전하는 그의 글과 글씨를 감상할 수 있고
그의 삶과 예술을 흠모하여 그가 남긴 향기를 쫓는 후학의 발길이 그치지 않는 이유일 것입니다.
저술을 내고서도 완당을 다 담아내지 못한 것을 유홍준이 걱정하고 있을 지경인데
어찌 책 한 권 읽은 것으로 완당을 모두 알게 된 것처럼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 책을 읽은 저도 완당의 작품 속 한 구절을 이용해서 저자처럼 말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山崇海深,
산은 높고 바다는 깊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