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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극기 휘날리며를 보고

류도한 2023. 2. 12. 17:20

 

 

지난 일요일 우리 가족은 모처럼 나들이를 했다. 바로 영화관이다. 서산에  그럴듯한 극장이 새로 생긴데다가 마침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국내 영화가 있어 보러 가기로 했던 것이다. ‘태극기 휘날리며’, 감독과 주인공의 명성만큼이나 연일 매진 사태를 일으키고 있다길래 아침 일찍 오후 네 시 상영분을 예매까지 했다. 예상대로 극장은 발디딜 틈 없이 북적거렸다.

  영화는 두 시간 삼십 분 동안 숨막히게 돌아갔다. 6.25를 배경으로 진한 가족애를 그려낸 작품이었다. 피난길에 붙잡혀 아무것도 모르고 출정하게 된 두 형제가 맞닥뜨린 현실은 가혹하다 못해 차라리 가련했다. 귓전을 뚫고 날아가는 총탄 앞의 인간이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가. 쇳덩이 밑에 깔린 풀잎이 그와 같을까. 어느 것도 그들의 의지대로 되는 건 없었으며 모든 자유는 ‘조국’이란 절대적 명제에 결박되었다. 그들은 다만 피를 나눈 동포를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어야 한다는 사실 앞에 자신들의 인간성을 헌신짝처럼 버릴 수밖에 없음을 알았다. 포탄이 머리 위에서 춤추는 전장은 인간의 존엄이 최고(最高)의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기존의 가치를 무의미하게 만든다.

  그러나 형제는 몸부림친다. 골육을 나눈 동생이, 형이 자신들의 목숨보다 소중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그들에게 민주니 공산이니 하는 따위의 이념은 한낱 허상(虛想)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단란한 가족이 함께 숨쉬는 공간과 시간만이 필요했을 뿐이다. 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이들의 꿈은 너무 멀리 있었고, 목숨조차 한 치 앞을 못 보는 상황만이 계속되었다.

  형은 집안의 미래인 동생을 제대시키기 위한 수순을 밟는다. 혁혁한 공을 세워 무공훈장을 따내는 것이다. 그건 목숨을 담보로 하고도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는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았고 어떤 잔인함도 그 명분 앞에선 무력해졌다. - 사실 영화는 그의 무조건적인 희생으로 인해 리얼리티를 어느 정도 손상당한 느낌이다. - 그러면서 그는 잃어갔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인간다움을. 그리고 그는 얻었다. 살인의 빛을 가진 살쾡이의 눈동자를, 산다는 건 죽음을 밟고 선다는 잔인함을.

  우리는 그의 마음을 충분히 안다. 동생을 포기하는 것은 집안을 포기하는 것이고 그것은 가장인 그에게 용납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그의 포악한 살인도 우리는 너그럽게 용서한다. 그의 총탄에 맞아 비명에 간 이들이 바로 나의 먼 친척이 될지라도 그의 몸부림을 끌어안아줄 용의가 있다. 그건 힘없는 민족이 그에게 준 멍에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가 그의 가족에게, 우리 민족 모두에게 채운 거역하기 어려운 족쇄임을 아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이 동생을 위한 것이든 조국의 안녕을 위한 것이든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가족이 먼저인지 국가가 우선인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그가 남쪽의 깃발을 들고 싸울 때도, 북쪽의 깃발아래서 싸울 때도 그는 우리 형제였고 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육십 억 인구 중 유전자와 골수가 가장 비슷한 칠천 만 명 중의 하나인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오는 이들의 표정이 궁금했다. 웃고 장난기 있는 얼굴로 떠드는 이들도 있었으나 대부분의 얼굴에는 무거운 빛이 역력했다. 치열한 싸움 끝에 죽은 주인공에 대한 애도였으리라. 아니, 영문도 모르고 끌려가 아무 원한도 없는 이웃의 가슴에 구멍을 내야했던 이들에 대한 비탄의 토로였으리라. 아니다. 그 무엇보다도, 일신의 영화를 위해 말도 안 되는 전쟁을 일으키고도 버젓이 살아남아, 일고의 양심도 없이 역사의 중심에서 떵떵거렸던 이들에 대한 분노였으리라. 또한 50여 년 동안 흘린 민족의 피눈물이 정치적 수단으로밖엔 보이지 않는 이들에 대해 절대로 용서할 수 없다는  결연한 의지였으리라.

  요즘 우리 영화가 국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스크린 쿼터제’를 부르짖으며 가두시위를 했던 영화인들에게 많은 힘이 되었을 것이다. 더불어 그들은 애국심에 호소하거나 할당제로 묶어 놓는 법적 효력보다는 영화의 질이 우리 영화의 살 길임을 알았으리라 생각한다. 그리고 그 질의 중요한 요소 중에 6.25라는 남다른 역사가 한 몫 하고 있음을 알 것이다. 바라건데 그것이 흥행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되지 않도록 냉정하고 예리한 시선을 놓지 말아야 할 일이다. 비록 아들의 손을 잡고 그 역사를 설명하는데 부끄러움이 따를지라도 미래를 위한 따끔한 일침이 될 수 있는 교훈으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