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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너다본 사랑채 처마 끝에 아침연기가 걸쳐있다. 박넝쿨이 무성하게 자라 지붕 위까지 올라가고 박꽃은 비를 피하여 큰 잎새 밑에 숨었다. 학교 가라고 손짓하듯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아직 학교 갈 생각이 없는 난 마루 끝에 앉아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보기도 하고 내 발 밑에서 몸을말고 있는 누렁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가지런히 내리는 빗소리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섞여있다. 지금 아이들을 따라 나서지 않으면 학교에 늦을지도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에 새벽부터 잠이 깨기 마련이다. 뒤척거리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마지못해 일어난다. 아침밥을 먹고 난 후 꾸물거리는 나를 본체 만체 하시고 엄마는 비설거지에 여념이 없으시다. 이제 밖에서는 가지런한 빗소리만 들려 올 뿐 다른 소리가 섞이지 않는다.
점점 조바심이 나기 시작한다. 지각한다는 생각을 하며 막 일어서려는 순간 우산을 들고 계신 엄마가 눈에 들어온다. 그 눈엔 화가 잔뜩 고여있다. 발 앞에 던져 놓으신 우산을 보니 또 그 헌우산이다. 새우산은 마루 끝 기둥에 기대 서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가 쓰실 우산이다. 작년에 쓰다가 툇마루 선반 위에 두었던 우산이 또 내 차지다. 쉽게 그칠 것 같지 않은 비를 바라보다 할 수 없이 헌 우산을 집어 든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 쓰고 있었다. 두어 개의 우산살이 부러져 있을 테고 나방은 제 집 인양 집을 지어 놓았을 것이다. 여기저기 몇 개의 구멍도 뚫려서 우산을 펼치면 그 구멍으로 비오는 하늘이 듬성듬성 보이기도 할 것이다.
먼지를 턴 우산을 펼쳐든다. 대문을 나서니 누가 만들어 놓았을까. 뽀얀 빗줄기 속에 마을이 담겨 있다. 우산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이다. 작은 집 감나무 위에 성글게 휘감긴 아침 연기, 맞은편 산자락에 걸쳐진 물안개가 자욱하다.
아이들이 학교로 가 버린 마을 가운데 큰 길은 텅 빈채 빗소리만 요란하다. 쏟아진 빗물이 요리조리 여러 갈래의 빗길을 만들어 놓았다. 군데군데 파여진 작은 웅덩이 안에는 찰랑거리는 빗물들이 넘쳐난다. 빗물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가 보기도 하고 걸음을 멈추고 작은 웅덩이들을 들여 다 보기도 하며 나는 학교로 향한다. 좀더 걸어가면 큰 미루나무들이 서 있는 언덕에 닿는다. 이 언덕은 더운날엔 바다 쪽에서 불어 오는 바람이 유난히 시원해서 하굣길에 친구들과 쉬어 가기도 하고 때로는 숙제를 하기도 하는 곳이다. 오늘은 미루나무 잎사귀에서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 듣기위해 나무밑에 서 본다. 툭 툭 굵은 빗방울이 우산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후두둑거리며 미끄러져 내리기도 한다. 그러면 살이 부러져 반쯤 접혀진 우산으로 흐르는 물이 내 옷을 적시게 마련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그 때쯤의 내 모습은 우산을 쓴 것이나 안 쓴 것이나 별 차이가 없이 젖어있다. 고무신 안에도 빗물이 들어 가 걸을 때마다 찌걱이는 소리를 내었다.
먹을거리 입을거리가 늘 부족하던 시절이었다. 하물며 어쩌다 비가 오는 날에만 쓰게 되는 우산 쯤이야 없는것이 당연하였다. 친구들이 새우산을 쓰고 오는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영옥이는 도롱이를 쓰고 학교로 왔었다. 바람이 불면 날아 가 버릴 것 같은 비닐우산에 의지해 오는 친구는 언제나 영일이었다. 명숙이는 늘 제 키보다 큰 자기 아버지의 우비를 쓰고 와 허수아비라는 놀림을 하루 종일 들어야 했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 생각해 보는 어린시절은 그리움이다. 부모님이나 가족 그리고 한 마을에서 식구처럼 지내던 친구들을 떠올리면 그 때의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여 다시 그 곳에 있는 것처럼 착각되는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일 것이다. 부끄러운 기억조차 서슴없이 꺼내어 웃을 수 있는 나이이기도 하련만 비 오는 날의 헌우산 기억만큼은 내 뇌리에서 언제나 우울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생각해 보면 힘들어 질 때마다 우산의 기억으로 더 힘든 시간을 보내는 나이기도 하다. 하지만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힘을 얻는 것도 그 우산의 기억이기도 한 것을 보면 이또한 어쩌지 못하는 내 감정의 모순이리라.
우울한 날이면 발길은 우산가게로 향한다. 가지런히 놓인 우산들을 바라보다 색깔 고운 것을 골라 어린 나에게 씌워 준다. 그러면 새 우산을 쓰고 강종대며 뛰어가는 모습이 눈에 가득해진다. 이런 상상은 내가 우울한 기억에서 벗어 나서 다시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 오는 방법 중에 하나이다. 그런 날은 어김없이 내 손에 새 우산 하나가 들려있고 우산 보관함에는 쓰지도 않을 우산 하나가 더 추가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