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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의 행복

류도한 2023. 2. 12. 19:00

요즘처럼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들녘은 매일 옷을 바꿔 입는다. 어제는 초록을 자랑하더니 오늘은 연노란 빛을 보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냄새도 변해 간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다른 때 같으면 누런 황금색을 자랑하고 있으련만 올해는 추석이 많이 이른가 보다. 들녘이 초록을 더 많이 닮았다. 올해는 햅쌀로 만든 송편을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추석은 즐겁기보다는 거추장스럽고 어려운 날이 되어간다. 결혼을 하기 전 추석에는 엄마, 아빠, 형제, 자매, 친척들을 만나 밤새워 수다를 떨었다.
  엄마는 밤새도록 두부를 만들기 위해서 맷돌을 돌리셨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커다란 가마솥에 갈아 놓은 콩물을 넣고 장작불을 지폈다. 콩물이 끓어 오르면 커다란 나무 주걱에 간수를 따라 가며 젓는다. 콩물은 하얀 우유빛에서 물빛으로 변하면서 순두부가 몽글몽글 생겨난다. 네모난 틀에 하얀 천을 깔고 한 바가지씩 순두부 물을 담는다. 담아진 순두부 위에 콩을 갈던 맷돌을 올려 놓으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물이 흘러 내린다. 두부가 다 만들어졌다. 엄마는 칼로 두부의 한 귀퉁이를 떼어 김치와 함께 마루로 가져다 주셨다.
  지금도 그 때 먹었던 두부 맛을 잊을 수가 없다. 결혼을 하고는 맛 볼 수 없는 추억의 맛이 되었다. 비단 이 두부의 맛만 추억이 되어 버린 건 아니다. 
  추석이면 서울에서 새 옷을 사 가지고 내려오는 셋째 언니를 기다렸다. 언제 올 지도 모르는 언니를 기다리며 강물에 조약돌을 던지고 강가에 자라던 억새를 꺾어 한 다발 만들어 놓았다. 해가 뉘엿뉘엿 산으로 넘어가는데도 언니는 오지 않았다. 언니에게 주려던 억새다발을 강가에 놔둔 채 동생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마당에서 뒤집어 놓은 솥뚜껑 위에 전을 붙이고, 할머니는 장작불을 때고 계셨다. 도시에서 먼저 온 다른 가족들은 토방 위 마루에서 송편을 만들었다. 수돗가 옆에서는 아버지가 닭을 잡아 손질하고 계셨다.
  엄마는 밤이 깊어 가도 부엌에서 음식을 준비하고 계셨다. 낮에 만들어 놓은 송편을 가마솥에 솔잎을 깔고 하나 하나 정성껏 올렸다. 그리고 바짝 마른 솔잎을 아궁이에 넣어 가며 불을 때고 계셨다. 빨갛게 타오르는 불 앞에 앉아서 잠시나마 허리를 펴고 휴식을 취하신 것 같다.
  송편이 다 익으면 송편에 참기름을 발라 내셨다. 참기름 냄새에 코가 더 빨리 송편을 찾았다. 엄마는 커다란 국그릇에 송편을 가득 담아 가족들 앞에 가져다 주셨다. 우리는 누가 만든 송편인지 가리느라 먹는 것은 뒷전이었다.
 늦은 밤이 되어서야 셋째 언니가 엄마를 부르면서 들어왔다. 언니의 손에 들린 커다란 짐은 언니만큼이나 반가웠다. 우리는 짐을 풀어 헤치고 자기 옷을 찾았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막내의 옷이 가장 화려하고 예뻤다. 내 옷은 그 뒤다. 동생 옷을 입혀 보고 예쁘다며 손뼉을 쳤다. 밤하늘에 달님이 환하게 웃고 있다.
  언니는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업무가 끝난 후에 며칠씩 시장을 돌아다니며 추석 빔을 골랐을 것이다. 그 때 철없는 동생들은 언니가 옷을 사 오는 것이 당연한 줄 알았다. 
 추석 날 아침이면 차례를 지냈다. 온 가족이 아침 밥상 앞에 둘러 앉았다. 새 옷을 입고 밥상에 앉아 내 밥그릇과 국그릇을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뿌듯했다. 추석은 어디를 가나 먹을거리가 넘쳐 났다. 
  산으로 가면 밤나무가 입을 헤 벌린 채 우리를 기다렸고 감나무 밭으로 가면 빠알간 감이 우리를 기다렸다. 하루종일 온 동네를 돌아다니다가 오후가 되면 모두 돌아갈 준비를 한다. 엄마는 큰 짐을 만들어 돌아가는 사람들 손에 하나씩 들려 주었다. 마을 버스를 타려면 이키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걸어 갔다. 엄마는 자식들 보따리를 머리에 이고 차부까지 데려다 주었다. 차가 뿌옇게 흙먼지를 날리고 떠날 때까지 손을 흔들고 계셨다.
 
  예전에 즐겁고 신명나던 명절은 어디에서 찾아야 하나. 나의 추억 속에 담겨진 명절은 그렇게 아름다운데 내 아이들은 명절의 어떤 추억이 담겨질까. 새삼 어머니라는 자리가 무거워진다. 나의 어머니에게도 명절을 지내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을지 결혼을 하고서 알았다.  
  내 어린 시절 만들어진 명절의 추억을 나만 가진 보물처럼 간직하는 것이 왠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 나의 어머니가 만들어 준 추억의 시간 속에서 나만의 아름다운 행복 주머니를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만들었던 추억과 아이들의 추억이 같을 필요가 있을까라고 변명 해 보지만 궁색해진다.
 결혼을 하고 지낸 지금까지의 명절을 돌아보면, 나는 부엌에서, 남편은 텔레비전 앞에서, 아이들은 거실에서, 각자의 명절을 준비했다. 마당에서 온 가족이 무엇인가를 준비하던 나의 어린 시절의 명절 모습이 지금은 없다. 좁은 통로로 이어진 부엌과 거실은 아이들과 엄마의 대화를 빼앗아 갔다. 닫혀진 안방 문은 남편의 뒤 꼭지를 미워지게 만들었다. 항상 아이들과 재잘대던 우리 집과 다른 분위기가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랬다. 십 년이 되어가는 지금에서야 이유를 알 것 같다. 주부인 나만 부엌에서 일해야하는 마음이 들게 하는 집안 구조가 문제였다.  
  나의 어린 시절을 뒤돌아 보니 명절을 준비하는 날은 방안에 들어가서 혼자 편안하게 노는 사람이 없었다. 온 가족이 함께 일을 도왔다. 할머니, 아버지, 오빠들, 모두 각각의 일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 내가 보내는 명절은 주부들만 일을 하고 있다. 그래서 명절이 힘들고 외로웠다. 작은 부엌에서 오랜 시간 고정된 자세로 기름 냄새를 맡는 것이 어찌 주부만의 고통이어야 하겠는가. 이제부터 부침개를 거실에 나와서 아이들과 남편과 함께 전을 뒤집어야겠다. 부쳐진 전의 모양이 좀 못 생기면 어떻겠나. 우리 가족사랑의 마음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 부침개를 거실에서 부치면 일거리가 더 늘어날 것이다. 아이들의 시중도 더 많이 들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만으로도 일이 힘들지 않을 것이다. 나의 집에서 아이들이랑 설거지를 해 보면 혼자 할 때보다 일이 훨씬 많아진다. 그러나 재잘거리는 아이들과 이야기 하면서 설거지를 하면 힘이 드는 줄 잘 모른다.
  나의 어린 시절에는 온 가족이 마당에 모여 명절을 준비했지만, 지금은 그 때만큼 장만하는 음식도 많지 않고 식구도 많지 않다. 그러니 좀 작은 거실에서 온 가족이 모여 앉아 즐겁게 명절을 준비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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