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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려나 보다.
먼 하늘이 어두워오기 시작하고 비릿한 냄새가 바람 끝에 묻어온다. 창문을 닫고 어둑한 방에 누워있자니 적당히 따뜻한 방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온몸이 나른하다. 이내 후두득거리며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나는 어린 시절 언제쯤에선가 내리던 빗소리를 기억해 낸다.
열 살 아니면 열한 살 쯤으로 기억한다.
여름 장마철이면 아침에 잠을 깨우는 건 빗소리였다. 처마 밑에 받쳐 놓은 양철통속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가 북을 치듯 요란했다. 수채로 내려가는 빗물의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뒤란에 감나무며 배나무 앵두나무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방울들도 수런거린다. 잠결에 이런 빗소리를 듣는 날이면 공연히 분주해져서 나는 서둘러 일어나곤 하였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양철통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세는 것이 고작이었다. 양철통이 다 찰 때까지 세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다가 보면 지루해지기 마련이어서 딴 생각을 하기도 하고 더욱이 학교 갈 준비를 하라는 어머니 성화 때문이기도 했다.
아침 연기가 안마당까지 자욱하게 내려앉아있다. 마른 솔가지 타는 향과 밥솥에서 나오는 따뜻한 밥 냄새 그리고 빗소리가 음악처럼 어우러지던 아침이었다.
아버지가 도롱이에 떨어진 빗물을 털며 대문 안으로 들어오셨다. 아마도 산에 다녀오셨나 보다. 비가 며칠씩 내리는 날에는 집 뒤 선산에서 버섯을 따오고는 하셨다. 내려놓은 바구니에는 싱싱한 버섯이 가득하였다. 갓버섯과 노란 색깔이 선명한 꾀꼬리버섯 그 밖에 먹을 수 있는 버섯들이 들어 있었다.
버섯을 보신 어머니가 빗속으로 나가더니 호박잎 몇 장 따오셨다. 그리곤 호박잎으로 버섯을 싸셨다. 아궁이속 불기가 남아있는 등걸불을 꺼내어 싸 놓은 버섯을 올려 놓으면 젖은 호박잎에서 떨어진 물기로 불꽃들이 사위어 들다 다시 살아나곤 하였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하고 나면 호박잎은 물기가 마르고 쪼글쪼글해졌다. 어머니가 그것들을 불에서 내려놓고 호박잎을 조심스럽게 젖히면 그 속엔 촉촉한 물기와 함께 반쯤 익은 버섯이 있었다. 따뜻한 김이 나오면서 맡아지던 버섯의 향과 소금을 살짝 찍어 입안에 넣으면 부드럽게 씹히던 그 속살의 맛을 어떻게 말하면 좋을까. 아버지 어머니와 함께 한 조촐하지만 향기롭던 성찬이 빗소리를 배경으로 나에게 그렇게 시작되었다. 그 여름동안 그리고 내가 중학교를 가기 위해 ! 서울로 가기 전까지 비오는 여름날 아침이면 계속되었던 일이었다.
기억이란 시간과 함께 잊어져 가기도 하고 가물거리는 생각의 저편에서 흑백사진처럼 남아있기도 하다. 꺼내 보면 흐뭇하고 행복해지는 모습들이 있는가 하면 후회스럽고 부끄러운 기억 또한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갈 줄도, 힘겨운 사람에게 기댈 어깨가 되어 줄 수 있었던 것은 어린 시절의 따뜻한 기억으로 가능했다고 말할 수 밖에 없다. 세상 속에서 부딪치던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놓을 수 없었던 것 그래서 나를 이만큼이라도 성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누구에게나 사람으로 인한 따뜻한 기억 하나쯤은 간직하고 있으리라 믿음으로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늘같이 비오는 날 더듬어 갈 수 있는 추억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가족과 함께 한 유년의 날들, 자라면서 만난 사람들과의 시간들이 소중하게 다가온다. 앞으로 살아가는 동안 지금보다는 따뜻한 사람으로 다가가야겠다는 다짐도 해 본다. 그것은 더불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해야 하는 많은 일중에 하나는 아닐까
아직도 양철통에 떨어지던 빗소리가 귓가에 들리고 아궁이 불빛 속에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 따뜻하다. 창 밖에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