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당(阮堂)과 추사(秋史)가 한 사람을 이르고 칠십일과(七十一果)와 비불비선(非佛非仙)도 다르지 않습니다. 김정희는 조선인이며 대한인이며 세계인이었습니다. ‘세상에는 추사를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아는 사람도 없’다는 저자 유홍준의 말이 하도 무서워서 일부러 속도를 늦춰 읽었고 구입한 지 반 년 만에 겨우 책 한 권을 다 읽어냈습니다. ***** 조선 시대의 4대 명필로 안평대군 이용, 봉래 양사언,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를 꼽는다. 그리고 우리나라 역사상 4대 명필로는 신라의 김생, 고려의 탄연, 조선 전기의 안평대군, 조선 후기의 김정희를 꼽는다. 또 그 중 둘을 고르라면 김생과 김정희만 남는다. 그러면 한 명만 꼽으라면 어떻게 될까? 나의 소견으로는 완당 김정희 이다. (424쪽) 유홍준은 완당의 ..
결혼한 후로 친구들과 떠나는 여행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이어서인지 몸보다도 설레임이 앞섰다. 더 늦기 전에 가을산을 보자는 심산으로 나선 길이었다. 청양을 거쳐 대전에서 대진고속도로를 타기로 한 우리는 졸음을 눈꼬리에 매단 채 어둠 속을 달렸다. 워낙 이른 시간에 출발해서일까, 홍성을 지날 때까지도 어둠은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논바닥에 누운 서리의 도도한 빛은 감출 수 없었던지 갖가지 형상으로 밤을 세운 하얀 군상들이 눈에 들어왔다. 조금 늦었나 보다. 단풍이 저리 시린 서리의 극성을 이태껏 버텨내고 있을까. 칠갑산 휴게소에서 된장찌개 한 뚝배기를 비우고 달리는 길은 한결 따숩게 다가왔다. 어느새 산 능선에는 붉은 빛이 찬연했고, 서리는 반짝거리다가 이내 아지랑이로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
그림책을 펴고 앉은뱅이 책상 앞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 있는 일곱 살 둘째의 책 읽는 소리가 제법 낭랑하다. 작년 12월이 돼서야 책을 읽기 시작했으니 또래보다 많이 늦었다. 그래도 느긋하게 기다려준 엄마에게 보답이라도 하려는 듯 발전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빠르다. 속 모르는 사람들은 엄마인 내가 교육에 큰 뜻이라도 있나 보다 생각했을 거고 아님 보기보다 아이를 방치한다고 했을 거다. 글이 눈에 들어오면서부터 아이는 세상이 더 신기하게 보이나 보다. 차를 타고 가면서 잠깐씩 멈춰진 차 안에서도 아이는 창밖의 간판을 읽어 내리기에 바쁘다. 둘째는 예정일보다 조금 빠르게 2.5킬로그램으로 태어났다. 그래서였을까, 누나와 비교하면 발육이 조금씩 늦었다. 그 중에서도 말은 정말 늦었다. 엄마, 물, 우유 소리는..

나이를 먹게 되면 마음도 함께 성숙되어 세상살이가 여유로워질 줄 알았다. 그러나 나 혼자였던 삶에서 남편을 만나고 아이들이 태어나고, 나만을 위한 생활에서 내가 끌어안아야 할 대상이 늘어가는 만큼, 보이고 느끼는 일에 걱정되고 화나는 일이 왜 이리 많아지는지, 나는 점점 마음이 조여듦을 느낀다. 나만 잘하면 되리라던 세상살이가 부딪히면 부딪힐수록 녹록치 않으니 두렵기도 하다. 내가 태어난 후 가장 많이 한 것이 사람을 만난 일 같다. 눈을 뜨면 아니, 꿈속에서조차 사람들을 만난다. 그럼에도 제일 어려운 일이 사람과의 만남이다. 아직도 나는 작은 일에, 사소한 것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날들이 많다. 그런 날은 하루 종일 모든 일이 엉망이다. 마음이 불편해지면 나도 모르게 책장 앞에 서게 된다. 그럴 때 뽑아..
비가 오려나 보다. 먼 하늘이 어두워오기 시작하고 비릿한 냄새가 바람 끝에 묻어온다. 창문을 닫고 어둑한 방에 누워있자니 적당히 따뜻한 방바닥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온몸이 나른하다. 이내 후두득거리며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고 나는 어린 시절 언제쯤에선가 내리던 빗소리를 기억해 낸다. 열 살 아니면 열한 살 쯤으로 기억한다. 여름 장마철이면 아침에 잠을 깨우는 건 빗소리였다. 처마 밑에 받쳐 놓은 양철통속으로 떨어지는 빗방울소리가 북을 치듯 요란했다. 수채로 내려가는 빗물의 찰랑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뒤란에 감나무며 배나무 앵두나무 잎사귀에 떨어지는 빗방울들도 수런거린다. 잠결에 이런 빗소리를 듣는 날이면 공연히 분주해져서 나는 서둘러 일어나곤 하였다. 딱히 할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마루 끝에 걸터앉아 ..
요즘처럼 가을 문턱에 들어서면 들녘은 매일 옷을 바꿔 입는다. 어제는 초록을 자랑하더니 오늘은 연노란 빛을 보인다.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냄새도 변해 간다. 며칠 있으면 추석이다. 다른 때 같으면 누런 황금색을 자랑하고 있으련만 올해는 추석이 많이 이른가 보다. 들녘이 초록을 더 많이 닮았다. 올해는 햅쌀로 만든 송편을 먹기는 어려울 것 같다. 세월이 지나면서 추석은 즐겁기보다는 거추장스럽고 어려운 날이 되어간다. 결혼을 하기 전 추석에는 엄마, 아빠, 형제, 자매, 친척들을 만나 밤새워 수다를 떨었다. 엄마는 밤새도록 두부를 만들기 위해서 맷돌을 돌리셨다. 아침에 일어나시면 커다란 가마솥에 갈아 놓은 콩물을 넣고 장작불을 지폈다. 콩물이 끓어 오르면 커다란 나무 주걱에 간수를 따라 가며 젓는다. ..

건너다본 사랑채 처마 끝에 아침연기가 걸쳐있다. 박넝쿨이 무성하게 자라 지붕 위까지 올라가고 박꽃은 비를 피하여 큰 잎새 밑에 숨었다. 학교 가라고 손짓하듯 잎사귀들이 흔들린다. 아직 학교 갈 생각이 없는 난 마루 끝에 앉아서 처마에서 떨어지는 빗물을 보기도 하고 내 발 밑에서 몸을말고 있는 누렁이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중이다. 가지런히 내리는 빗소리에 아이들의 재잘거리는 소리가 섞여있다. 지금 아이들을 따라 나서지 않으면 학교에 늦을지도 모른다. 비가 오는 날이면 빗소리에 새벽부터 잠이 깨기 마련이다. 뒤척거리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마지못해 일어난다. 아침밥을 먹고 난 후 꾸물거리는 나를 본체 만체 하시고 엄마는 비설거지에 여념이 없으시다. 이제 밖에서는 가지런한 빗소리만 들려 올 뿐 다른 소리가 섞..

25년 동안 코흘리개 아이들의 고무신 바닥에 이름을 새겨주신 선생님. 이런 선생님이 계셨다면 믿을 수 있겠어요? 그러나 정말 이런 분이 계셨습니다. 해방 후인 1947년에 교직 생활을 시작해 1976년 퇴직을 하실 때까지 시골 초등학교의 평교사로 30여 년 동안 재직하시면서 지금은 사라진 아이들의 검정고무신에 낱낱이 이름을 새겨주신 선생님...... 뿐만 아니라 굶주리고 헐벗은 아이들을 먹여주고 씻어주고 재워주고....... 날마다 도시락을 두 개 씩 싸 갖고 가서 아이들과 바꿔먹고...... 1976년, 퇴직을 1년 앞두고 마지막으로 근무했던 산골 초등학교에서 5월 14일 날 쓰신 이 선생님의 일기 원문입니다. "우리 학급은 生日 祝賀會를 한다. 기념품이랬자 20원짜리 공책 한 권 정도. 오늘은 金00..